안녕하세요, 디온(@donekim)입니다. 최근 스팀 블록체인에 열심히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는 스팀엔진팀 그리고 스팀코인판과 트리플에이 운영팀을 보며 들었던 개인적인 생각을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1. 백서가 꼭 필요할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사토시 나카모토가 비트코인이라는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한 전자화폐 시스템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고 나서, 오늘날 그 청사진은 모든 크립토씬 프로젝트들에서 백서라는 이름으로 기본적인 양식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백서(whitepaper)란 해당 프로젝트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어떤 기술과 토큰 이코노미, 어떤 로드맵을 가지고 있으며 그 팀이 무엇을 하기 위해 모였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일종의 사업계획서 같은 길고 자세한 문서입니다. 웬만한 크립토씬에서 알려진 프로젝트라면 공식 홈페이지에서 백서를 쉽게 찾아서 다운로드 받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백서가 없는 크립토씬의 프로젝트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룸 네트워크와 스팀엔진, 그리고 스팀엔진 기반의 프로젝트들입니다. 혹자는 백서라는 것은 해당 프로젝트의 운영팀이 잠재적인 투자자들에게 자신들의 비전이나 기술력, 로드맵, 팀원들의 경력 등을 소개하고 재정적/정신적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기본이 되는 이 백서라는 것이 없으면 해당 프로젝트를 무엇을 보고 신뢰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정말 맞는 지적입니다. 사업을 하려는 사람이 “앞으로 자신이 어떤 일정을 가지고 어떤 팀을 꾸려서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어떤 목표를 어떤 기술을 통해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는 간단한 문서가 없다면, 해당 프로젝트나 사업을 신뢰할 수 있는 마땅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투자자들에게 신뢰를 얻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만약 백서 대신에 신뢰할 수 있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면 어떨까요?
현재 크립토씬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현존하는 수 천, 수 만 가지의 프로젝트들의 백서 중 90% 이상이 가치가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수학식을 나열하여 마치 기술력이 있는 것처럼 속이는 백서, 네임 밸류가 높은 팀원들이나 영향력 있는 어드바이저 군단으로 무장하고 휘황찬란하게 써내려 갔지만 막상 알맹이는 없는 백서, 그리고 나름 디테일하게 쓰여져 있지만 실제로 개발이 쓰여진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백서, 가장 최악으로는 오히려 해당 프로젝트의 백서를 읽으면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에 대해 공부를 할 수 있는 백서들이 너무 많습니다. 백 번 양보를 해도 잘 쓰여진 백서를 찾는 것은 해변에서 바늘 찾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백서는 블록체인 기술, 암호학 등에 무지한 대중을 이용하는 마케팅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백서는 “토큰이 이래서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토큰을 만들거야! 하지만 Disclaimer가 있다는 것을 잊지마!”로 요약이 됩니다.
#2. 백서가 없는 프로젝트들
백서가 없는 프로젝트들도 사실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그 백서가 없는 크립토씬의 프로젝트들의 공통점은 백서 뿐만 아니라 다른 정보들도 없다는 것입니다. 끽해야 공식 홈페이지, 트위터 계정, 텔레그램 커뮤니티 정도일 뿐이고 개발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다음에 깃헙을 공개할 것이라는 둥, 아니면 어느 정도 제품이 완성되면 엄청난 공식 발표와 파트너십이 있을 것이라는 둥 근거 없는 소문들 많이 무성하죠.
그리고 그런 프로젝트들에서 소위 “먹튀”라는 사기가 벌어져서 많은 투자자들이 피해를 입곤 합니다. 비트커넥트부터 시작해서 거래소까지 상장했지만 사실은 실체가 없었던 전례가 워낙 많았던 탓에, 크립토 씬에서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은 “스캠 프로젝트에 속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백서가 없는 룸 네트워크나 스팀엔진, 그리고 스팀엔진 기반의 프로젝트들도 이렇게 위험성이 높고 신뢰도가 떨어지는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제 판단은 “그렇지 않다”입니다.
물론, 이 모든 프로젝트들이 얼마 전의 매직 다이스처럼 언제라도 서비스 운영이 중단되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가버릴 수는 있지만 그것이 백서의 유무와는 아무런 연관성을 가지지 못하고, 룸 네트워크, 스팀엔진, 스팀엔진 기반의 프로젝트들은 “소통, 커뮤니티, 그리고 실제 사용할 수 있는 프로덕트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사실 실제로 서비스를 운영하는 주체의 신상정보를 알 수 있다면 문제가 생겼을 때 경찰서로 달려가거나 멱살을 잡으러 그 주체를 직접 찾아갈 수 있다는 측면에서 백서와 팀원의 신상은 투자자들의 안전성을 매우 높여줄 수 있는 장치라는 점은 확실합니다. 이를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완벽하게 완성되지 않았더라도 무언가를 계속해서 만들어나가고 있고, 사용자들이 그 프로덕트나 서비스를 계속해서 실제로 사용해볼 수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판단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코인이나 토큰에 투자를 하시는 지 모르겠지만, 저는 단기 하이프를 이용한 매매를 할 목적이 아닌 이상 장기 포트폴리오에 포함하는 토큰들을 선별할 때 “내가 직접 써볼 수 있는 것이 있느냐”를 가장 큰 기준으로 두고 있습니다.
제가 투자하는 프로젝트의 팀원들은 글을 잘쓰기 보다는 설계, 운영, 개발을 잘하는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내가 직접 쓰고 만져보고 하면서 더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고, 해당 프로젝트를 신뢰할 수 있게 되더라구요.
#3. 최적 설계라는 것은 진화
여러분들께서는 위의 지도에서 보이는 마을 중 어느 마을에서 살고 싶으신가요?
이 질문은 약 1년 전에 Taylor Pearson이 Why the ‘Worst’ Crypto Networks Will Be The Biggest라는 코인데스크 기고문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예전에 읽었던 글이지만 가장 흥미롭게 읽은 글 중 하나라, 즐겨찾기 해놓고 지금도 가끔씩 읽는 글입니다.
혹시 선택을 하셨나요?
그리고 위의 지도는 프랑스의 파리, 밑의 지도는 브라질의 브라질리아의 지도입니다. 아마도 해당 도시가 어디인지를 딱 보고 아셨던 분이 아니라면, 위의 지도보다는 아래의 지도를 선택하신 분들이 많으셨을겁니다. 저도 그랬구요.
사실 브라질리아는 중앙화된 계획을 통해 완벽하게 설계가 되어 탑다운(Top-down)방식으로 만들어진 계획도시이고, 파리는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면서 주민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자연적으로 진화해나간 버텀업(Bottom-up)방식으로 만들어진 자연진화도시입니다.
겉보기에는 브라질리아가 완벽한 계획을 통해 잘 설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주하는 사람들의 정확한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진화한 파리가 실제로는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싶어하는 대표적인 워너비 도시 중 하나가 되었죠.
여타 크립토씬의 다양한 프로젝트들도, 스팀 블록체인도, 그리고 스팀엔진과 스팀엔진 기반의 프로젝트들도 깨끗한 길이 생길때까지 마냥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휘황찬란한 백서로 신뢰를 얻는데 시간을 쓸 필요도 없습니다. 길이 나 있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계속 걷다보면 그것이 길이 됩니다.
인간도,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복잡한 시스템도 가장 원시적인 단계에서 진화해왔습니다. 블록체인과 크립토 생태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우리 스스로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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